글 · 무명
들판에서 제일 빠른 토끼와 연못가의 늙은 거북이가 언덕 꼭대기 깃발을 두고 겨룬다. 이길 게 뻔한 경주에서 토끼는 왜 졌을까?
제1화 · 느티나무 아래의 낮잠
들판 한가운데, 토끼풀이 가장 짧게 깎인 자리에 동물들이 빙 둘러섰다. 가운데에는 토끼가 뒷발로 땅을 툭툭 차고 있었다.
"느림보야, 너 정말 나랑 겨루겠다는 거야?"
토끼가 귀를 쫑긋 세우고 웃었다. 맞은편의 거북이는 목을 천천히 빼고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가 보면, 알겠지."
둘러선 동물들이 킥킥거렸다. 심판을 맡은 여우가 꼬리로 바닥을 두 번 쳐서 조용히 시켰다.
"규칙은 하나다. 저기 언덕 꼭대기에 내가 꽂아 둔 빨간 깃발이 보이지? 깃발을 먼저 뽑는 쪽이 이긴다."
여우가 앞발을 들었다가 내리자 경주가 시작됐다. 토끼는 바람처럼 튀어나갔다. 민들레 씨앗이 한꺼번에 날아올랐고, 눈 깜짝할 사이에 토끼의 하얀 꼬리가 들판 끝으로 작아졌다.
거북이는 한 발을 내딛고, 숨을 한 번 쉬고, 또 한 발을 내디뎠다.
얼마 지나지 않아 토끼는 언덕 중턱의 느티나무 아래에 닿았다. 뒤를 돌아보니 들판에는 거북이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해는 머리 위에서 뜨겁게 내리쬐었고, 느티나무 그늘은 서늘하고 푹신해 보였다.
"저 느림보가 여기까지 오려면 해가 지겠네."
토끼는 하품을 하며 느티나무 그늘에 벌렁 누웠다. 딱 한숨만 자고 일어나 달려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나뭇잎 사이로 바람이 솔솔 불었고, 토끼의 긴 귀가 천천히 내려앉았다.
그동안 거북이는 들판을 건너고 있었다. 풀잎에 맺힌 이슬을 지나고, 개울 위 징검돌을 하나씩 건넜다. 개구리가 "벌써 졌는데 왜 가?" 하고 물어도 거북이는 대답 대신 한 발을 더 내디뎠다.
해가 기울 무렵, 거북이는 언덕 중턱에 이르렀다. 느티나무 아래에서 토끼가 코를 골며 자고 있었다. 하얀 꼬리가 숨을 쉴 때마다 들썩였다.
거북이는 걸음을 멈추고 잠든 토끼를 오래 내려다보았다.
거북이는 토끼를 깨우지 않았다. 대신 발소리를 죽이고, 아까와 똑같은 걸음으로 느티나무 곁을 지나갔다. 한 발, 숨 한 번, 또 한 발.
언덕은 가팔랐다. 등딱지가 무거웠고 목이 뻐근했다. 그래도 거북이는 멈추지 않았다. 바람이 거세지는 걸 보니 언덕 꼭대기가 가까웠다.
그때 느티나무 아래에서 토끼가 번쩍 눈을 떴다. 그늘이 길게 늘어져 있었고, 하늘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
"벌써 저녁이라고?"
토끼는 고개를 들어 언덕 꼭대기를 보았다. 빨간 깃발 바로 옆에 이끼 낀 둥근 등딱지가 보였다. 토끼는 있는 힘을 다해 뛰었다. 바람보다 빨랐지만, 이번에는 너무 늦었다.
거북이가 주름진 목을 길게 빼고, 입으로 빨간 깃발을 물어 뽑았다. 지켜보던 동물들이 와 하고 소리쳤다. 여우가 꼬리를 높이 들었다.
"거북이가 이겼다."
숨을 헐떡이며 도착한 토끼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거북이는 깃발을 내려놓고 천천히 말했다.
"나는, 멈추지 않았을 뿐이야."
천천히 가도 꾸준히 가는 쪽이 끝내 경주에서 이긴다. 그날 이후 들판의 동물들은 느리다는 말을 놀림으로 쓰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