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입니다. 오늘 서울의 하늘은 종일 흐리겠습니다.”
휴대폰이 두 번째로 울고 나서야 손이 이불 밖으로 나갔다. 여섯 시 사십 분. 알림 이름은 지난주 금요일 밤에 내가 직접 바꿔 둔 그대로였다. ‘가지 마.’
커튼 틈으로 들어오는 빛이 아침의 것이라기엔 너무 탁했다. 형광등을 켜지 않은 사무실 같은 색. 천장을 보면서 나는 이번 주말에 하려던 일을 하나씩 지웠다. 세탁기 돌리기, 밀린 드라마 두 편, 오후 네 시쯤 일어나 짜장면 시키기.
화장실 거울 앞에서 칫솔을 문 채 지난 화요일 회의실을 떠올렸다. 대표는 커피를 휘저으며 웃고 있었다.
“다들 토요일에 일정 있지? 그럼 막내가 가야겠네. 딜소싱이라고 생각해.”
그 자리에서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수첩에 볼펜으로 동그라미만 계속 그렸다. 회의가 끝났을 때 동그라미는 열네 개였고, 내 이름은 이미 운영사 메일 참조란에 들어가 있었다. Ambition for Korea, 서울 AI 허브, 9시부터 21시. 심사위원 명찰은 어제 퀵으로 집에 도착했다.
현관 신발장 위에서 명찰이 끈째로 늘어져 있었다. 분홍 꽃이 횃불을 든 로고. 목에 걸자 플라스틱이 쇄골에 차갑게 닿았다. 문을 열려다 말고 하늘을 한 번 더 확인했다. 아파트 맞은편 동 꼭대기가 구름에 반쯤 먹혀 있었다.
우산꽂이에서 검은 우산을 뽑았다. 살 하나가 휘어서 펼 때마다 한쪽이 주저앉는 놈이다. 버리려고 세 번쯤 마음먹었던 우산.
2호선에서 신분당선으로 갈아탄 건 여덟 시 이 분이었다. 계산대로라면 여덟 시 사십 분 양재시민의숲역, 아홉 시 전 입장. 빠듯하지만 가능한 숫자.
열차가 터널 한가운데서 멈춘 건 여덟 시 십일 분이었다.
“신호 장애로 열차가 잠시 정차하고 있습니다. 승객 여러분의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처음 오 분은 다들 휴대폰을 봤다. 십 분째에는 맞은편 아저씨가 한숨 대신 혀를 찼고, 등산복 차림의 아주머니 둘이 김밥을 꺼냈다. 참기름 냄새가 객차에 퍼졌다. 나는 괜히 가방 지퍼를 열었다 닫았다. 안에 든 건 노트북, 충전기, 전날 출력한 41팀 명단뿐이었다.
명찰이 손가락에 걸려 뒤집혔다.
뒷면은 그냥 흰 플라스틱이어야 했다. 그런데 거기 회색 숫자가 떠 있었다. 처음엔 인쇄 불량이라고 생각했다. 엄지로 문질러도 지워지지 않았다.
민준 3.12
그 옆에 작은 달러 기호. 숫자의 끝자리가 형광등 아래서 희미하게 깜빡였다. 나는 출력물을 꺼내 명단을 훑었다. 일자리 트랙, 에이전트 트랙, 뷰티 트랙. 팀 이름만 있고 개인 이름은 없었다. 민준이라는 사람을 나는 알지 못한다.
3.11.
숫자가 줄었다. 누가 어딘가에서 지금, 이 시각에 무언가를 쓰고 있었다.
휴대폰이 진동했다. 모르는 번호, 문자 미리보기에 ‘운영팀 지수’.
“선배님 혹시 어디쯤 오세요?? 1차 심사 동선 리허설이 9시 정각이라서요 선배님”
바로 전화가 이어서 왔다. 받자마자 숨찬 목소리가 쏟아졌다.
“아 받으셨다! 지금 한 총괄님이 심사위원님들 다 오셨냐고 세 번째 물어보셔서요, 대충 몇 분이면 되세요, 선배님?”
객차 창밖은 시커먼 터널 벽뿐이었다. 손에 쥔 명찰 뒷면에서 3.11이 다시 깜빡였다. 나는 입을 열었다가, 무슨 말을 할지 정하지 못한 채 다시 다물었다.
“혹시 참가자 중에 민준이라는 사람 있어요?”
수화기 너머가 잠깐 비었다.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 누군가 멀리서 마이크 테스트를 하는 소리가 섞여 들어왔다.
“네? 민준이요? 아, 잠깐만요. 지금 그게…… 성은요?”
“몰라요.”
“참가자가 백오십 명이라서요. 민준이 한 다섯 명은 될걸요. 근데 그건 왜요?”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명찰 뒷면이 그렇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엄지가 숫자 위를 계속 문지르고 있었다.
“그냥요. 아는 사람 동생이 나온다고 해서.”
“아 그러시구나! 그럼 이따 찾아드릴게요. 그래서 몇 분이요?”
열차가 덜컹 하고 앞으로 밀렸다. 김밥을 들고 있던 아주머니가 은박지를 놓칠 뻔했고, 객차 안 몇 사람이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
“지금 출발했어요. 사십 분 안쪽.”
“사십…… 네, 제가 어떻게든 말씀드려 볼게요. 꼭 와 주세요!”
전화가 끊겼다. 화면에는 8시 31분이 떠 있었다. 이십 분. 안내 방송에서 말한 ‘잠시’는 정확히 이십 분이었다.
열차가 속도를 올리는 동안 나는 명찰을 다시 뒤집지 않으려고 손바닥으로 덮어 두었다. 덮고 있으니 오히려 플라스틱 아래가 뜨거운 기분이 들었다. 판교 방향 표지판이 지나갔다. 맞은편 아저씨는 아까 혀를 찬 게 머쓱한지 괜히 신문을 접었다 폈다.
양재시민의숲역에 내린 건 9시 3분이었다.
계단을 두 칸씩 올랐다. 가방 속 노트북이 등뼈를 때렸다. 출구를 나서자 공기가 눅눅했고, 하늘은 아침보다 한층 더 내려와 있었다. 길 건너 건물 옥상의 광고판 꼭대기가 구름에 잘려 보이지 않았다. 지도 앱은 도보 9분이라고 했다. 나는 그 숫자를 6분으로 고쳐 읽었다.
횡단보도 신호를 기다리는데 손등에 차가운 점 하나가 찍혔다.
이어서 하나 더. 아스팔트 위에 동전만 한 얼룩이 드문드문 생겨났다. 옆에 서 있던 대학생 하나가 후드를 뒤집어썼다.
나는 검은 우산을 펼쳤다. 휘어진 살 쪽이 예상대로 주저앉아 왼쪽 어깨가 바로 젖기 시작했다. 버리지 않은 걸 칭찬해야 할지 욕해야 할지 모르는 채로 신호가 바뀌었다.
태봉로로 꺾어지자 유리 외벽이 보였다. 서울 AI 허브. 입구 위 현수막에 분홍 꽃 마스코트가 횃불을 들고 웃고 있었다. 빗물이 현수막 아래로 줄을 그었다.
유리문 앞에서 형광 노란 조끼가 손을 흔들었다. 눈 밑이 거뭇한 여자가 명찰을 펄럭이며 뛰어나왔다.
“선배님 맞으시죠? 지수예요! 아 진짜 다행이다, 리허설 아직 안 끝났어요, 빨리요 빨리요 선배님!”
지수가 내 팔을 잡아끄는 사이 우산을 접으려다 손이 미끄러졌다. 명찰이 끈을 따라 한 바퀴 돌아 뒷면이 위로 올라왔다.
민준 2.87.
그리고 그 아래, 아까는 없던 줄이 하나 더 있었다.
차하윤 0.00
숫자는 깜빡이지 않았다. 고개를 들었다. 입구 처마 밑, 비를 피하는 사람들 틈에 회색 단발 하나가 서 있었다. 색 바랜 티셔츠 가슴께에 Bloom이라는 글자가 반쯤 지워져 있었고, 왼쪽 귀에 끈으로 묶은 낡은 팔찌가 흔들렸다.
지수는 그쪽을 한 번도 보지 않고 지나쳤다. 처마 밑의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그 여자만 똑바로 나를, 정확히는 내 목에 걸린 명찰을 보고 있었다.
여자의 입술이 느리게 움직였다. 빗소리에 묻혀 들리지 않았는데도 나는 그 말을 읽을 수 있었다.
“보이지, 너.”
크레딧이 다하면 잊힌다
Cast
민준 · 서연 · VC 심사위원(나) · 지수 스태프 · 차하윤 · 한태오름 운영총괄
Episode 1
출근길
✦“토요일입니다. 오늘 서울의 하늘은 종일 흐리겠습니다.”
휴대폰이 두 번째로 울고 나서야 손이 이불 밖으로 나갔다. 여섯 시 사십 분. 알림 이름은 지난주 금요일 밤에 내가 직접 바꿔 둔 그대로였다. ‘가지 마.’
커튼 틈으로 들어오는 빛이 아침의 것이라기엔 너무 탁했다. 형광등을 켜지 않은 사무실 같은 색. 천장을 보면서 나는 이번 주말에 하려던 일을 하나씩 지웠다. 세탁기 돌리기, 밀린 드라마 두 편, 오후 네 시쯤 일어나 짜장면 시키기.
화장실 거울 앞에서 칫솔을 문 채 지난 화요일 회의실을 떠올렸다. 대표는 커피를 휘저으며 웃고 있었다.
“다들 토요일에 일정 있지? 그럼 막내가 가야겠네. 딜소싱이라고 생각해.”
그 자리에서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수첩에 볼펜으로 동그라미만 계속 그렸다. 회의가 끝났을 때 동그라미는 열네 개였고, 내 이름은 이미 운영사 메일 참조란에 들어가 있었다. Ambition for Korea, 서울 AI 허브, 9시부터 21시. 심사위원 명찰은 어제 퀵으로 집에 도착했다.
현관 신발장 위에서 명찰이 끈째로 늘어져 있었다. 분홍 꽃이 횃불을 든 로고. 목에 걸자 플라스틱이 쇄골에 차갑게 닿았다. 문을 열려다 말고 하늘을 한 번 더 확인했다. 아파트 맞은편 동 꼭대기가 구름에 반쯤 먹혀 있었다.
우산꽂이에서 검은 우산을 뽑았다. 살 하나가 휘어서 펼 때마다 한쪽이 주저앉는 놈이다. 버리려고 세 번쯤 마음먹었던 우산.
2호선에서 신분당선으로 갈아탄 건 여덟 시 이 분이었다. 계산대로라면 여덟 시 사십 분 양재시민의숲역, 아홉 시 전 입장. 빠듯하지만 가능한 숫자.
열차가 터널 한가운데서 멈춘 건 여덟 시 십일 분이었다.
“신호 장애로 열차가 잠시 정차하고 있습니다. 승객 여러분의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처음 오 분은 다들 휴대폰을 봤다. 십 분째에는 맞은편 아저씨가 한숨 대신 혀를 찼고, 등산복 차림의 아주머니 둘이 김밥을 꺼냈다. 참기름 냄새가 객차에 퍼졌다. 나는 괜히 가방 지퍼를 열었다 닫았다. 안에 든 건 노트북, 충전기, 전날 출력한 41팀 명단뿐이었다.
명찰이 손가락에 걸려 뒤집혔다.
뒷면은 그냥 흰 플라스틱이어야 했다. 그런데 거기 회색 숫자가 떠 있었다. 처음엔 인쇄 불량이라고 생각했다. 엄지로 문질러도 지워지지 않았다.
민준 3.12
그 옆에 작은 달러 기호. 숫자의 끝자리가 형광등 아래서 희미하게 깜빡였다. 나는 출력물을 꺼내 명단을 훑었다. 일자리 트랙, 에이전트 트랙, 뷰티 트랙. 팀 이름만 있고 개인 이름은 없었다. 민준이라는 사람을 나는 알지 못한다.
3.11.
숫자가 줄었다. 누가 어딘가에서 지금, 이 시각에 무언가를 쓰고 있었다.
휴대폰이 진동했다. 모르는 번호, 문자 미리보기에 ‘운영팀 지수’.
“선배님 혹시 어디쯤 오세요?? 1차 심사 동선 리허설이 9시 정각이라서요 선배님”
바로 전화가 이어서 왔다. 받자마자 숨찬 목소리가 쏟아졌다.
“아 받으셨다! 지금 한 총괄님이 심사위원님들 다 오셨냐고 세 번째 물어보셔서요, 대충 몇 분이면 되세요, 선배님?”
객차 창밖은 시커먼 터널 벽뿐이었다. 손에 쥔 명찰 뒷면에서 3.11이 다시 깜빡였다. 나는 입을 열었다가, 무슨 말을 할지 정하지 못한 채 다시 다물었다.
“혹시 참가자 중에 민준이라는 사람 있어요?”
수화기 너머가 잠깐 비었다.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 누군가 멀리서 마이크 테스트를 하는 소리가 섞여 들어왔다.
“네? 민준이요? 아, 잠깐만요. 지금 그게…… 성은요?”
“몰라요.”
“참가자가 백오십 명이라서요. 민준이 한 다섯 명은 될걸요. 근데 그건 왜요?”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명찰 뒷면이 그렇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엄지가 숫자 위를 계속 문지르고 있었다.
“그냥요. 아는 사람 동생이 나온다고 해서.”
“아 그러시구나! 그럼 이따 찾아드릴게요. 그래서 몇 분이요?”
열차가 덜컹 하고 앞으로 밀렸다. 김밥을 들고 있던 아주머니가 은박지를 놓칠 뻔했고, 객차 안 몇 사람이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
“지금 출발했어요. 사십 분 안쪽.”
“사십…… 네, 제가 어떻게든 말씀드려 볼게요. 꼭 와 주세요!”
전화가 끊겼다. 화면에는 8시 31분이 떠 있었다. 이십 분. 안내 방송에서 말한 ‘잠시’는 정확히 이십 분이었다.
열차가 속도를 올리는 동안 나는 명찰을 다시 뒤집지 않으려고 손바닥으로 덮어 두었다. 덮고 있으니 오히려 플라스틱 아래가 뜨거운 기분이 들었다. 판교 방향 표지판이 지나갔다. 맞은편 아저씨는 아까 혀를 찬 게 머쓱한지 괜히 신문을 접었다 폈다.
양재시민의숲역에 내린 건 9시 3분이었다.
계단을 두 칸씩 올랐다. 가방 속 노트북이 등뼈를 때렸다. 출구를 나서자 공기가 눅눅했고, 하늘은 아침보다 한층 더 내려와 있었다. 길 건너 건물 옥상의 광고판 꼭대기가 구름에 잘려 보이지 않았다. 지도 앱은 도보 9분이라고 했다. 나는 그 숫자를 6분으로 고쳐 읽었다.
횡단보도 신호를 기다리는데 손등에 차가운 점 하나가 찍혔다.
이어서 하나 더. 아스팔트 위에 동전만 한 얼룩이 드문드문 생겨났다. 옆에 서 있던 대학생 하나가 후드를 뒤집어썼다.
나는 검은 우산을 펼쳤다. 휘어진 살 쪽이 예상대로 주저앉아 왼쪽 어깨가 바로 젖기 시작했다. 버리지 않은 걸 칭찬해야 할지 욕해야 할지 모르는 채로 신호가 바뀌었다.
태봉로로 꺾어지자 유리 외벽이 보였다. 서울 AI 허브. 입구 위 현수막에 분홍 꽃 마스코트가 횃불을 들고 웃고 있었다. 빗물이 현수막 아래로 줄을 그었다.
유리문 앞에서 형광 노란 조끼가 손을 흔들었다. 눈 밑이 거뭇한 여자가 명찰을 펄럭이며 뛰어나왔다.
“선배님 맞으시죠? 지수예요! 아 진짜 다행이다, 리허설 아직 안 끝났어요, 빨리요 빨리요 선배님!”
지수가 내 팔을 잡아끄는 사이 우산을 접으려다 손이 미끄러졌다. 명찰이 끈을 따라 한 바퀴 돌아 뒷면이 위로 올라왔다.
민준 2.87.
그리고 그 아래, 아까는 없던 줄이 하나 더 있었다.
차하윤 0.00
숫자는 깜빡이지 않았다. 고개를 들었다. 입구 처마 밑, 비를 피하는 사람들 틈에 회색 단발 하나가 서 있었다. 색 바랜 티셔츠 가슴께에 Bloom이라는 글자가 반쯤 지워져 있었고, 왼쪽 귀에 끈으로 묶은 낡은 팔찌가 흔들렸다.
지수는 그쪽을 한 번도 보지 않고 지나쳤다. 처마 밑의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그 여자만 똑바로 나를, 정확히는 내 목에 걸린 명찰을 보고 있었다.
여자의 입술이 느리게 움직였다. 빗소리에 묻혀 들리지 않았는데도 나는 그 말을 읽을 수 있었다.
“보이지, 너.”
To be continued